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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과 물의 속삭임
시와 감성
2017년 07월 13일 (목) 15:07:41 임종권 webmaster@cwmonitor.com
   

풀잎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단다
세상에는 그냥 지나쳐 버린 것들이 많지만,
풀잎은 그 자리에 남아
너를 기다리려 왔었지.

눈이 녹은 후에 물이 되어 땅을 적시고 나면
풀은 그 위에 고개를 내밀고
이제야 봄 하늘을 바라본다.

하얀 구름이 바람에 쫓기여 저만치 달아나면
풀잎은 고인 물을 잠시 건들여
봄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누구나 홀로 태어나지 않듯
꽃에게는 햇빛이 있고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듯이
봄도 혼자 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산과 들에도 봄은 왔겠지?
해맑은 얼굴로 나무에게 말한다
너에게는 내가 있어,

곧 비가 내리면 더 자란 풀들과 어린 나뭇잎들과
그리고 어린 꽃들도 끝내,
설레임으로 물 위에 편지를 남길거야 .

우리 삶에는 기쁨과 행복보다 슬픔과 괴로움이 더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종교적으로 생각하면 인간은 그리 좋은 존재가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듯 인생은 고(苦)이고 생(生)은 무의미하다. 이것도 윤회한단다. 무한히 반복되는 삶이라니 인간은 애초부터 고통의 생명체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을 슬프다고 생각하나보다 . 또 기독교에서 볼 때 인간은 죄의 존재이다 보니 인생은 그저 형벌에 불과하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천국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단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보면 인간의 존재는 한낱 풀잎과 같다.

풀잎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단다
세상에는 그냥 지나쳐 버린 것들이 많지만,
풀잎은 그 자리에 남아
너를 기다리려 왔었지.


겨울에 마른 풀잎들은 봄을 기다리며 하얀 눈 속에 파묻혀 있다. 그 위에 푸른 하늘이 보이지만 차갑다. 때론 구름으로 뒤덮여 하얀 눈으로 풀잎들을 덮는다. 한 생명체의 흔적이 그렇게 서글프다. 차가운 바람이 스쳐갈 때마다 마른 풀잎들은 허망한 삶에 소리도 없이 운다. 그 울음이 잔잔해 지면 마른 나뭇가지의 흔들림이 지난날들의 푸르름을 기억하게 하지만 그것은 지친 추억이다. 무수한 얘기들이 쌓여 있을 법하지만 시간에 쫒겨 어디론가 다 흩어져 버렸다. 몸을 그 자리에 남긴 채 삶의 흔적들만 남은 터에 흙에 묻어 논 내가 있다.

나는 봄을 기다린다. 정확히 말하면 다시 윤회의 수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생(生)을 시작한다? 웃기는 일이지만 분명 이것은 고(苦)다. 기다리는 윤회의 수레는 멀리서 다가오고 있다. 지긋지긋한 한 시절을 쓰라리게 벌레와 옆 잡풀들과 싸워야 한다. 그 자리에서.

눈이 녹은 후에 물이 되어 땅을 적시고 나면
풀은 그 위에 고개를 내밀고
이제야 봄 하늘을 바라본다.


녹은 눈이 땅 속으로 스며든다. 차가운 물줄기에 갈증을 해소하고 고개를 내밀어 보려 하지만 아직 땅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냉혹한 흙들을 뚫고 밖에 나서면 하늘은 저번과 똑같다. 달라진 건 땅이다. 없는 나무가 옆에 심어져 있다. 그 나무들의 뿌리는 내 삶을 고달프게 할 것이다. 그래도 난 기다린다. 마른 풀의 기다림은 운명이다.

하얀 구름이 바람에 쫓기여 저만치 달아나
풀잎은 고인 물을 잠시 건들어서
봄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하늘은 평화롭지 못한다. 구름에 가려진 것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징조이다. 하늘은 늘 불안하다. 때론 무섭고 두렵다. 그래서 풀은 마른 풀은 조심스럽게 흙 속에서 나와야 한다. 이따금 하늘에서 맑은 핏물이 떨어진다. 고인 핏물을 마시며 처절한 자연의 몸짓을 본다. 허망한 생각이 벌써 나뭇가지 위에 서성인다. 바람이 한차례 나무를 건들면 나무는 울먹이며 운다. 봄은 그때 마음이 흔들린다. 나무의 슬픔을 보며 연약한 봄의 마음은 괴로움에 젖는다. 운명은 그렇게 연민에서 시작한다.   

누구나 홀로 태어나지 않듯
꽃에게는 햇빛이 있고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듯이
봄도 혼자 오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누구나 혼자가 아니다.


세상에는 홀로 태어나지 않는다. 누구나 꽃과 나무와 바람과 구름과 함께 세상에 와서 살아간다. 소멸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은 비와 바람의 사랑일 것이다. 봄도 혼자 먼 길에서 오지 않는다. 쌓인 눈 위로 걸어 올 때 매서운 삭풍과 같이 온다. 봄은 그래서 훈훈하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가 혼자가 아니다. 사랑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혼자라고 생각한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나무는 혼자가 되듯이 세상에는 내 옆에 있던 사람이 떠나면 홀로 남는다.

지금 산과 들에도 봄은 왔겠지?
해맑은 얼굴로 나무에게 말한다.
너에게는 내가 있어,
곧 비가 내리면 더 자란 풀들과 어린 나뭇잎들과
그리고 어린 꽃들도 끝내,
설렘으로 물 위에 편지를 남길 거야 .


봄은 땅 속에서 일어나 흙을 뚫고 밖으로 나온다. 꽃을 한 아름 가슴에 안고 봄바람을 타고 웃음을 띠며 나에게로 온다. 나무는 파란 하늘의 햇빛을 바라보며 “나 여기 있어“라고 외친다.” 구름 타고 온 비가 잠자는 풀을 흔든다. 세상에는 새로 생겨난 어린 것들로 가득하다.

인간의 마음도 어린 시절 가장 순수하다. 커가면서 거칠어지고 서로 싸운다. 이기심이 많아야 꽃도 피울 수 있다. 욕심이 많아야 나비와 벌들이 찾아온다. 꽃들은 탐욕과 잡풀들과 굵을 나무뿌리와 싸워 이긴 탐욕의 유혹이다. 어쩌면 그 유혹의 향기에 이끌려 사람들을 첫사랑을 만날 때 가슴이 설렐 것이다. 지금 겨울이 먼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 빈자리에 봄이 찾아 올 것이다. 우리 빈 가슴에 언제나 사랑이 차지하고 있듯이 세상의 빈 곳에 언제나 생명의 꽃이 있기 마련이다. 꽃의 집은 봄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꽃 속에서 살아간다. 세상 모든 생명들을 이웃으로 삼아 함께 살아간다. 

시인  임종권은 1995년 순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2005년 제9회 에피포도 예술상 시부문 수상 그리고 2008년 영랑문학상 수상했다.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기다리는 사람에겐 영원한 헤어짐은 없다>, <전주 시가도>, <바람에 띄우는 편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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