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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에 있어서의 나의 여정(2)
2017년 04월 20일 (목) 11:38:11 문전섭 역 (전 싱가포르 선교사) moonjs@hotmail.com
Wonsuk Ma (Oral Roberts University, Tulsa, Ok, USA) 문전섭 역 (전 싱가포르 선교사)
다음은 IBMR Volume 40 Issue 4 October 2016에서 번역한 것임


아지 세우고 있는 선교 토대들


다음 10년에서 전체 6년 동안, (1985-96), 우리는 켈리포니아에서 살았고 또한 공부하였다. 또한 우리의 아시아의 맥락은 변화하였다: 마닐라로부터 한 가지의 명백한 사실들은 북쪽에 있는 Bagulo의 도시로까지. 한 가지의 명백한 시실들은 우리의 공부들이었는데, 그것은 격렬하게 우리의  전 가족을 서구 삶의 핵심에 또한 광범한 범위의 교회 전통들 (또한 그것들의 각각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면서)에 노출시켰다.
  
이름 있는 오순절적인 학자인 William Menzies가 1984년에 Feast의 임시 총장이 되었을 때, 그는 즉시 교수단 발전 프로그렘을 조직하였다. 1985년에 두 명의 미국의 단기 선교사들과 내가 우리의 PhD공부들에 보내어졌다. 이것은 대담한 시책이었는데, 그러나 그는 명백히 미래의 교수 요원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에 대한 결정적인 중요성을 보았다. 우리는 후에 이것은 Feast의 학문적인 우수성을 강력한 전환점 및 기초였던 것을 알았다 (그것은 1989년에 그것의 이름을 Asia Pacific Theological Seminary로 바꾸었다).
  
나는 학교를 둘러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우선 아시아에서의 하나를 주장하였다.모든 나의 아시아적인 선택들을 소진한 후에, 한 존경받는 필리핀의 기독교 교육자인 Trinidad Selsky와 상담하였는데, 그녀는 챌리포니아 파사데나에 있는 풀러 신학교로부터 석사학위를 획득하였다. 그녀의 현명한 충고는, “만약 당신이 미국인들과 일하려면, 그곳으로 가십 시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볼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들과 힘께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였던 것입니다. 이 짧은 대화는 내가 경험하였던 최상의 지혜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미국에서의 나의 처음의 2년의 경험 (1985-87)은 풀러의 다-교파적인 성격이어서 확실히 도전적이었고 또한 계명 적이었다. 처음 공부의 2년 후에, 우리의 가족은 그 국가의 여름의 수도로 알려진, 그 신학교가 이 산지 도시로 이주하였음으로, 필리핀 Baguo로 돌아왔다. 구 도시는 여섯 개의 산지 지역들의 중심지였는데, 그곳들의 사람들은 Igorots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의 식민 세력에 의해 그래서 기독교에 의해서도 거의 접촉되지 않은 체로, Igoros족은 그들의 문화적 및 종교적 독특성을 보존시켜왔는데, 그들의 언어 및 지독하게 저 개발된 사회 및 저변과 함께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Bagulo의 삶을 시작하였을 때 (1987), 우리는 이 도시에로의 종족 인민들 중에 지역 교회들에의 참여를 시작하였는데, Banguct지역의 멀리 떨어져 있는 산지 마을들에 이르도록 확대하면서 말이다.우리가 나의 공부를 마치기 위하여 1992년에 켈리포니아로 돌라왔을 때, Julie는 또한 그녀 자신의 PhD공부를 시작하였다. Igoros 족 사이의 그 오순절적인 사역에 대한 그녀의 연구는 우리 자신의 사역들로부터 무겁게 끌었다. 우리는 행복하게도 1996년 같은 날에 함께 졸업하였다.
  
이때까지 해서, 한국의 하나님의 성회는 그것의 외국 선교 부를 조직하였고, 또j한 나는 공식적으로 그것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과업은 우리의 재정적인 어려움들에 대한 어떤 감소의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의 공부들 동안, 아시아 태평양 신학교 (Asia Pacific Theologicl Seminary)는 고맙게도 재정들을 제공하였으며 또한 한국에 인천 순복음교회 (최성규 목사)는 또한 우리의 두 번째 공부를 위하여 우리를 지원하였다.

성령 안에서의 선교 (1996-2006)

필리핀에서의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선교적인 참여들에 대한 흐름들을 보았다. 지난 10년에서의 준비들과 , 경험들과, 그리고 노출들에 근거되어, 우리는 한국의 오순절적인 선교사들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더 의식하게 되었다.
  
그 신학교의 우두머리 관리인이 되어 (학장, 후에 학사의 부종장이라 불리었다) 나는 두 개의 초점적인 노력들을 시작하였다. 그 첫 번의 것은 학문적으로나 목회 적으로, 교수단에 대한 아시아인의 성원들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어떤 주어진 때에, 교수단은 12명 을로 구성하였는데, 절반은 아시아인들로, 그 다른 절반은 서구인들로 한다. 선교사적인 공동체였음으로, 각 사람은 선교사적인 은사로서 왔으며 또한 각 사람은 재정들을 포함하여 그 단체의 삶에 기여했다. 우리의 떠날 때까지 해서, 12명의 교수단들 중에서 약 10명의 PhD 소지자들이 있었고 또한 아시아인들과 비-아시아인의 균형도 공평하게 유지되었다.
  
나의 두 번째의 강조는 아시아적인 오순절적인 연구들의 발전에 대한 것이었다. 1998년에 한국 서울에서 아시아적인 오순절인 협회를 조직하는 것은 아시아에서 오순절적인 연구들에 참여하고 있으며 또한 연구 관심들을 격려하는 것은 한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 다음 해에, Asian Journal of Petecostal Studies가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나에게 잡지 편집과 출판에 대하여 맡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서 우리는 그 신학교에서 오순절적/은사적인 연구들에 있어서의 새로운 대학원 프로그램들을 더하였다.

강력한 연례적인 강의에 덧붙여, 종종의 오순절적인 강의들은 세계적인 학자들을 그 캠퍼스에 데려왔던 것인데, 다양한 오순절적인 /카리스마적인 전통들과, 신학들과, 또한 영성들을 설교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가톨릭의 은사주의학과, 남 아프리카의 오순절주의와, 오세니아 주의 오순절주의와, 유럽 오순절주의와, 또한 아르리카-아메리카의 오순절주의를 포함하였다. 그 신학교의 출판 오른 팔인, APTS 신문은 또한 계기를 얻고 있었다.  그 신학교는 오순절주의적인/카리스마주의적인 연구들에 있어서 Wales Bangor 대학교의 PhD 프로그렘을 주재하였는데, 이리하여 그 학교로 하여금 최고 수준의 아시아의 오순절주의 지도자들을 준비시키는 것을 허용하면서 말이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확대된 견해는 단지 우리의 기관 생활 뿐 만 아니라 또한 우리 자신의 삶에도 충격을 주었다. Julie와 나는 더 넓은 교회 연락망들에 있어서 아시아의 오순절 인들을 대표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참여는 Costa Rica에서의 1996년에 오순절주의의 세계화에 대한 국제적인 회합과 더불어 시작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WCC와의 여러 가지의 상봉들에 참여하였다. 이런 새롭게 일어나는 지구적인 기독교적인 Forum은 강한 오순절적인 참여를 초청하였으며 또한 우리는 아시아적인 또한 첫 번의 국제적인 회합들을 위하여 밀접하게 일하였다.

개혁교회적-오순절과의 대화는 우리를 연례적인 신학적인 대화를 위한 세계의 여러 가지의 부분들에 우리를 데려갔다. 우리가 상이한 교회 가족들과 상호작용 하는 때, 우리의 이해는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의 역사와, 또한 현대의 오순절주의의 자리를 깊게 하였다. “2010년을 향한”첫 번의 (1910년의 에딘버러 세계 선교대회의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계획) 회합이 소집되었을 때, Julie와 나는 그 20명-멤바 그룹에 참여하도록 초대되었다.
 
또한 200년에 Asian Mission의 잡지를 포함하였던 그 잡지의 편집 및 출판에 덧붙여, 출판에 대한 나의 열정은 커가기 시작하였다. julie와 나의 학위 논문들이 이 시기에 출판되었고, 또한 그것들의 제목들은 오늘날에서도 성령 및 그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깊은 관심을 강하게 반영한다: When the Spirit meets the Spirits (Julie의 것)와 또한 Until the Spirit comes: The Spirit of God in the Book of Isiah (나의 것).두 개의 Festschriften이 이 프로젝트들에서 수립된 (흔히 서구의) 상대역들로 참여하도록 새로운 아시아의 오순절적인 사상가들을 데려오곤 했던 이 시기에 출현하였다. 비슷하게, 많은 아시아의 기고자들이 그 두 개의 잡지들에 그들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출판하였다.Birmingham 대학교의 Allan Anderson이 아시아의 오순절주의에 대한 커다란 회합을 계획하였을 때, 우리와 또한 여러 다른 신학교 성원들이 그 회합에 깊이 참여되었고 또한 그 결과로 Asian and Peticostal의 출판이 있었다 (2015). 여러 개 이상의 우리의 편집된 책들의 이 시기에 출현하였다.
 
이러한 커가는 학문적인 삶의 와중에서, 우리의 최전선의 선교는 계속하였다. 나와 가까이 걸었던 많은 선생님들 중에, 한 분의 산지 목사가  출중하게 들어났다. 단지 초등학교 교육만 받았던 한 종족 목사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영적인 은사들을 가진 복음에 대한 그의 깊은 헌신이 뛰어났다. 특히, 영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삶에서 애쓰고 있었던 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기독교 선교가 일체 무엇에 관한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상기 물이었다.

우리가 필리핀을 떠났을 때, 약 160개의 그런 작은 회중들이 그 산지 지역들을 통하여 설립되어왔던 것인데, 또한 지역 사회와 그리고 사회적인 센터들로서 말이다. 그러하여, 우리의 역할들은 엄밀하게 학문적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들 사역들은 이들 회중들에서의 각각의 지도자들이 받았던 신의 소명의 표현이었다. 우리는 한 작은 선교사의 현존은 국가적인 성원들을 충분히 책임지게 했던 것인데, 자기-선취적이며 또한 자기-공급적이었던 사역들을 육성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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