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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에 있어서의 나의 여정(1)
2017년 04월 20일 (목) 11:36:47 문전섭 역 (전 싱가포르 선교사) moonjs@hotmail.com
Wonsuk Ma (Oral Roberts University, Tulsa, Ok, USA)
문전섭 역 (전 싱가포르 선교사) 다음은 IBMR Volume 40 Issue 4 October 2016에서 번역한 것임




나의 선교적인 여정에 대한 이 자기-반성은 특히 “선교”의 의미에 대한, 학습의 과정으로서 특징되어진 것이다. 선교사적인 형성은 한 사람의 영적인 발전의 일부이며 또한 내게 있어서, 여러 개의 교차-문화적인 맥락들에서의 몰두는 그 과정을 가속화 시켰다. 미국에서의 공부와 결합된, 필리핀에서의 장기간을 통하여, 선교에 대한 나의 이해는 깊어졌다. 옥스퍼드에 있는 OCMS에서 선교 지도력에 대한 또 다른 10년은 선교에 대한 나의 이해에 대한 더욱더 발전의 차원을 더하였다. 이런 계속적인 여정을 통하여, 나는 선교에 대한 여러 놀라운 “교사들”을 가졌다. “새로운”선교사적인 교회에서의 경험들을 반영하면서, 이 “여정”은 지구의 남쪽의 선교 일꾼들을 위하여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선교 학습, 선교 형성, 영성, 지구적인 기독교, 지구적 남쪽

나의 선교적인 삶의 40년째에 이르러서도, 나는 아직도 선교를 그것의 복잡성 및 깊이에서 파악하기가 어려운 제목임을 발견한다. 이 반성의 목적은 나의 아내 Julie와 내가 “선교사들”로서 우리의 삶을 살았음으로 나의 선교 인식에 대한 발전을 추적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그와 같이 한 자서전이 아닌 것이다; 만약 독자들이 관심이 있다면, 그들은 그 외 다른 곳에서 선교에 있어서의 우리의 삶에 대한 간단한 회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맥락과 또한 기독교적인 형성

나는  극심한 일본의 식민 통치로부터의 한국의 해방과 (1910-45)그리고 황폐한 한국 전쟁 (1950-52) 사이에, 1949년에 태어났다. 이것은 전쟁과, 가난과, 전후의 독재와, 베트남 전쟁과, 군사 통치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또한 그 이상을 통과했던 세대인 것이다. 인권의 침범들에도 불구하고, 식탁에 먹을 것을 유지시키는 것은 모든 가족의 우선순위였다. 국가는 일반적으로 이리하여 군사 통치를 관용하였다. 교회 역시 번영한 삶에 대한 이 국가적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또한 동시 일치 적으로 이 기간은 기독교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성장을 보았다.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를 갖고서 다윗 용기 조의 거대한 사역의 발흥은 한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고된 일에 대해 동기 되어진, 가난한 대중들은 하나님의 기적들의 메시지와, 치유와, 또한 축복을 환영할 복음으로 들었다. 산 기도는 사람들로 가득 찼는데,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과 기적들을 간절히 추구하였던  불신자들을 포함하여서 말이다.
  
하나님과의 내 자신의 영적인 조우는 기본적으로 성격에 있어서 오순절 적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장로교 가족 전통으로부터였는데 그러나 그녀가 나의 아버지와 결혼 하였을 때 그녀의 새 가족에서 유일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녀의 비종교적인 가족은 그녀의 기독교 신앙을 완강하게 반대함으로서 갑자기 종교적인 광신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속적이었고 또한 우리 아이들 다섯은 모두 행복하게 주일학교를 즐기면서 그녀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나의 10대에서, 그녀가 나의  소아마비로-쓰러진 자매를 인근의 도시에서 치유 집회에 데려갔을 때, 나의 기독교 신앙은 처음으로 도전을 받았다. 나의 자매는 결코 치유되지 않았을 지라도, 주님께 대한 그녀의 필생의 봉사는 한 지속적인 “치유의” 간증이 되어왔다. 그 두 번째 도전은 오순절적인 과부 아래서의 나의 매일의 영적인 삶이었는데, 그녀의 “우는” 교회는 우리 지역의 다른 기독교인들에 의해서까지 무시당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의 도움으로서만 가능하였던 생존의 방법들을 간절히 찾고 있었던 사람들을 매력적으로 끌어 당겼다.
  
성경 대학에로 갈 나의 결정은 가난 때문에 고통스럽게도 대학교에의 입학에 대하여 포기하는 것의 결과였다. 고등학교 후에 그 실망하는 해들 동안, 나는 주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부흥사의 강력한 (그러나 거대한) 설교를 농하여 사역에의 소명을 받았다. 1학년이 끝나기 전에, 나는 나의 의무적인 군복무를 시작하였다. 나는 나의 70년대의 중반까지 해서 나의 3년의 군복무로부터 (그 중의 2년은 베트남이었다} 성경 대학에로 돌아왔을 때, 국가적인 분위기는 변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마침내 국가는 그것의 만성적인 전후의 가난 및 독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1988년에 올림픽 경기들을 주최했던 것은 성장하는 경제적 및 국가적인 확신과 더불어 국제적인 여행의 자유화를 가져왔다.
  
나의 첫 신학적인 훈련은 순 복음 성경 대학교에서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다윗 용기 조의 그 유명한 순복음 교회가 1955년에 시작하였던 곳에 서 있는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해서, 그 대학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열풍이라 불리어 질 수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의 영적인 삶을 본받았는데, 그것은 기도와, 금식과, 대망의 사고와, 교회 성장에 대한 믿음 및 치유와, 또한 그의 독특한 남동부의 어투로서 말하는 것을 배우는 것까지를 포함하였다. 나는 내가 상이한 질문들을 물었을 때 이런 순 복음 문화와는 기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특별히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저주들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는 그 팽배한 신학적인 가설에 대하여 불편하였는데; 이리하여 우리에게 남겨진 모든 것은 선한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것의 열매에 만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때 조의 사역에로 들어갔던 그 눈물들 및 애씀 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을 의심쩍게 생각했다. 사실상, 나는 흔히 조가 그의 차의 뒷자리에 얼마나 많은 책들을 실어 날랐던 것을 알아차렸던 것인데, 그것은 공부 및 기도에의 그의 커다란 헌신을 반영하였으며, 자연히 그의 거대한 사역을 뒷받침하였다. 나는 단지 우리가 무엇을 믿는 가 뿐 만 아니라 또한 왜 그렇게 하였는가를 묻고 있었다. 어떤 이는 생각해야 한다. 나는 생각하였다. 1976년에 나의 4년 과정 을을 끝냈을 때 까지 해서 나의 급우들의 대부분은 이미 목회를 하고 있었다. 우리중의 소수만이 다음에 무엇을 할 가를 궁금해 하고 있었다.

선교를 이해함 없이 선교를 시작하기

그 동일한 부근에서의 본래의 조의 회중의 남은 사람들과 함께 시작하였던 교회는 자비롭게도 나를 나의 불확실성들로부터 구하였다. 대조 순복음 교회라 불리어진, 그것의 신사적인 목사는 우리의 집단에서는 희귀함인, 그의 반성적인 사고로 알려졌다. 주일학생들을 돌보는 한 편, 나는 마침내 내가 4년 동안 데이트했던 Julie와 결혼하였다. 내가 더욱더 공부 및 거기에서의 그 후의 가르침을 위하여 (1983-85), 필리핀으로 떠나고 있었을 때, 부족한 외화를 절실히 저축하기 위하여, 나의 정부는 나의 가족이 함께 여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있어서 한국의 선교사들은 단지 6개월만의 여권을 가졌는데, 구체화된 그 여행 국가 및 흔히는 한국 밖의 단수 여행에 적합한 것을 가지고서 말이다. Julie는 대조 순 복듬 교회에서 다시사역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한 편 한 살도 못된 우리의 아들 Woolim은 남한의 그들의 도시서 나의 부모들과 살기 위하여 보내졌다. 1년 반 동안, 우리 모든 세 사람은 이리하여 선교의 이름에서 서로 떨어져 있었다.   
  
베트남에서의 나의 2년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의 다 국적의 학생 집단에의 나의 문화적인 잠금은 나를 놀라게 했다. 나의 가족으로부터의 떨어진 나의 외로운 세월들은 다른 문화들과 함께 사는 것을 배우는 것과 또한 귀중한 언어-영어-를 획득하기 위한 희귀한 기화로 입증되었다. Julie가 Woolm과 함께 나와 함께 했을 때, 그녀는 그녀의 남편으로서 과격하게 변하여진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크게 애썼다.

나는 아직도 선교사로 불리어지는 것을 거부하였을 지라도, 그녀에 따르면, 나는 이미 철저하고 철저한 사람이었다/ 기도의 여인으로서, 그녀는 매일의 조반을 금식하기로 결정하였고 또한 이 심각한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년 이상 동안 기도하였다. 그녀는 하나님에게 두 가지의 선택들을 드렸다: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바꾸어주시든가 혹은 그녀를 선교사적인 삶으로 회심케 하시든 가인 것이다. 하나님은 후자를 선호하셨으며, 또한 Julie는 결국 훈련받은 선교학자가 되었다.
  
마닐라의 교외들에 극동 신학원 (Far East Advanced School of Thology)은 국가 교회들의 지도자들 및 성경 대학들의 교수 성원들의 훈련을 위한 하나님의 단체의 한 지역 모임들인 것이다.  그 교수 요원들은, 1명의 필리핀인을 가진, 압도적으로  북미 선교사들이었는데, 그 1명의 필리핀인은 등록 관리인으로 봉직하였던s 것이다  1983년에 우리 중의 5인은 신학석사의 첫 번째 반이었다. 그 당시에, 미국은 그 교단이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던 그 유일한 다른 곳이었다. 그 거주하는 교수단은 아카데미 프로그램들의 급속한 팽창과 더불어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 아래 있었다. 이러한 특별한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상당히 많은 과정들은 방문 강사들에 의해 가르쳐졌다.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Gordon D. Fee와 William W. Menzies와 또한 Del Tarr와 같은 그런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결코 선교사들이라고 불리어지지 않았는데, 그러나 그들이 하는 것은 명백히 선교 적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각자의 나라들에서 이런 아카데미의 수준을 성취한 첫 번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서, 우리 “마닐라 5인”은 아시아의 오순절주의의 미래를 위하여 어떤 부채의식을 지녔다. 우리가 엄청나게 고마워할지라도, 아시아의 오순절주의가 미국 운동의 복사판이 될 수 없다는 어떤 합의가 도닿 되었다. 그 그룹은 우리중의 1인이 그 모교의 교수단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누가? 이것은 내가 선교에 대한 소명이 무엇을 의미하였는가를 헤아리기 위하여 깊이 애썼던 때였다. 그 결정짓기 과정은 여러 가지의 주요한 요소들을 작용하게 했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와, 나의 은사들 및 욕망들에 대한 평가와,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그 단체의 요구들에 대한 평가와 그리고 나의 잠재적인 공헌.
  
이것은 또한 우리가 선교적인 부름 (missional call)과 선교사적인 부름 (missionary call) 사이에 차이를 배웠던 때였다. Julie는 이때까지 해서 충분히 선교사적인 여행에 올라탔던 것이며, 또한 내가 그 학교에서 나의 교수를 시작했을 때, 그녀 또한 인근의 베델 성경 대학에서 그녀의 것을 시작하였다. 이 맥락에서 우리가 만들었던 두 개의 첫 번의 것들이 있었다. 나는 국가의 하나님의 성회에 의해 보냄을 받은 첫 번의 아시아의 선교사 교사였으며, 그리고 또한 그 교수단에서 봉직하였던 첫 번의 동문이었다. 후에, 나는 가장 오래-봉직한 교수 성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생활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단 한 달의 수입으로부터의 미약한 재정적인 자원들을 갖고서, 우리의 목표는 생존이었다; 우리의 애쓰는 영어를 갖고서, 우리의 과녁은 한 코스를 한 번에 통과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제 학생들 앞에 섰었을 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학습은 아직 계속하였던 것을 느꼈다. 사실상, 많은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였다: 만약 우리를 삶과 사역의 이 도전적인 다음 단계로 부르셨던 이가 하나님이셨다면, 그것을 일어나게 했던 이도 그 동일한 하나님이셨을 것이다. 그리고 도움에 대한 하나님의 나누심은 우리가 자주 그를 회상하였을 때 재정과 영어를 포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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