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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境을 넘었기에(1)
2016년 07월 27일 (수) 16:59:08 향강 장정문박사(시인 소설가, 철학박사) hyanggang@hanmail.net
   
▲ 장정문 박사
내가 지난 날 사경死境을 넘어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기에 이 글을 쓸 수 있다. 내 인생 과거에 몇 번 죽을 위험 위기를 넘겼다는 뜻이다. 이런 위험체험이야 나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비슷했고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극심한 사경을 겪은 사람들도 적지 않겠지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인생길 나의 그 생명위기들을 글로 남기고 싶은 것이다.

나는 지금 스스로 물으며 생각한다. 어떻게, 아니 왜 내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그저 운이 좋아서? 죽을 운명이 아니니까? 아니다. 결코 우연이거나 세속적 운명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늘의 뜻이고 은혜였다. 그 소년시절과 이십대 초기에는 내가 기독교신앙인도 불교신자도 아니어서 기도를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늘은 그 때에도 나와 함께 계셨다고 생각한다. 하늘은 나를 살려주셔서 훗날 어떤 일을 하도록 뜻하시고 섭리하셨다고 믿는다. 오늘날 내가 깨달은 신앙이고 神學的 소신이다.

1977년 여름이었다. 내가 캐나다시민권자가 되면서 꿈에도 잊을 수 없었던 북한고향방문, 평안남도 成川郡의 한 시골마을, 나의 옛집에 돌아갔을 때이다. 감격의 눈물로 두 분 어머니들과 세 여동생들, 그 가족들을 극적으로 만난 다음날 아침이다. 내 여동생 명옥의 남편, 즉 내 매제가 내게 말한다.

“형님은 살아 있을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살아 돌아오셨어요...”

나는 ‘하느님이 나를 살려주셨지’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을 못하고 눈물만 글썽거렸다. 내 생각에도 분명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 목숨이 생존해서 귀향을 한 것이다. 나의 고향친구들, 학교동창생들은 전쟁과 피난길, 그 이후에도 열악한 상황에서 병들어 거의 다 죽었으니 말이다. 내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은 天佑神助가 아니겠는가.

우선 한국전쟁 중에 내가 체험한 생명위기부터 말해 본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약 3개월 후인 10월 중순, 내 나이 스물한 살인데 나는 강원도 안변지역의 한 산중에서 인민군대열을 목숨 걸고 탈출하게 된다. 이런 결단을 하게 된 이유가 있다. 내가 원산 인근의 산중에서 인민군대원으로 있는 어느 날 밤인데 긴급야간동원으로 소대원들이 트럭짐칸에 가득히 실려 세워진 채로 원산해안으로 달리고 있었다. 트럭이 좌우로 흔들려 서로 부대끼면서 내 어깨에 멨던 장총이 벗겨져 밑에 깔려 딴 대원의 총과 바뀌었다. 그 다음날 부소대장(중국팔로군 출신 조선족)의 방공토굴에 불려갔다. 나보다도 한두 살 아래인 그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극한의 말을 한다.

“동무는 군인이 총을 바뀌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총살이다. 그리고 조사해보니 동무는 고급중학교 때도 반동적 학생이었다. 이런 반동이니 총탄이 아니고 총창으로 찔러죽이겠다. 나가 있으라.”

이런 극악 극단의 살해위협까지 들었으니 너무도 겁이 났는지 어떤지 정신이 벙벙해졌다. 어느 순간 나는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 아닌가. 나는 불안, 기력을 잃고 나의 분대방공호에 돌아왔다.

그 무렵 동경, 맥아더유엔군총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진을 하게 되고 동해안 전선으로는 한국군이 북진하여 강원도 안변지역의 산을 넘어 올 때이다. 위급한 전황이 다가왔다. 내가 속해있던 중대가 적과 전투를 한다며 밤중에 남쪽으로 행군, 이동하여 어떤 산중에 배치되었다. 그 다음날 이른 아침 산꼭대기에 우리 소대원들을 매복시켜 사격준비를 시킨다.

“적군이 들어온다! 사격준비! .. 사격” 소대장이 서서 명령했다. 내 옆에 매복하여 총을 겨눈 팔로군출신은 저 산 아래 밭에 기어들어오는 적병이 보인다면서 탕 탕 총사격을, 막심중기관총 사수는 뜨르륵 드르륵. 기관총사격도 했다. 나는 매복한 한국군을 보지 못했지만 사격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총대를 약간 올려 공중으로 두 번 총 방아쇠를 당겼다. 우리 소대는 십오 분정도 그 산위에 사격태세로 엎드려 있다가 “뒷산으로 이동!”이라는 명령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뒷쪽 산으로 옮겨 능선을 타고 후퇴할 때이다. 나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고 이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대장은 대열의 맨 선두에, 대열 맨 끝에는 그 사나운 부소대장이 권총을 들고 “빨리 따라와..” 소리 지르며 서둘러 간다. 나는 두 손에 무거운 기관총탄 두통을 들고 따라가게 되어 이것이 잘된 기회라, 더 무거운 시늉으로 절뚝거리며 뒤로 점점 쳐졌고 그 대열의 후미가 산정으로 멀어질 때 골짝 아래 숲길로 빠져 내려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 뒤쪽에서 “장동무, 우리 소대 이 골짝으로 내려갔소?” 라고 묻는다. “예, 이 골짝아래로요.” 나는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고지식한 군인 역시 조선족 팔로군출신으로 나보다는 서너 살 위인데 기관총탄약통을 네 개를 들고 따라오느라 내 뒤로 더쳐졌던 것이다. 우리는 골짝 밑에 내려왔고 나는 큰 바위돌 구석진 지점에 주저앉았다.

“이렇게 무거운 탄창을 들고는 소대를 따라갈 수 없어요. 탄창을 땅에 묻어요.” 내가 먼저 말했다. 그는 주저하다가 어쩔 수 없었는지 총창으로 숲속 땅을 파고 탄창들을 묻었고 내 탄창까지 묻어준다. 그러고는 나처럼 앉지 않고 그 골짝 이쪽저쪽을 살피며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내게로 돌아와 말한다. “우리는 적에게 포위되었소. 나 죽을 거요.”‘라며 수류탄을 허리의 띠에서 빼들고 골짝 아래로 내려갔다. 만약 그가 함께 죽자며 내 앞에서 그 수류탄을 터뜨렸다면 나도 틀림없이 그 골짝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는 나까지 죽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것 같다. 중국 내몽고출신 조선족 모택동의 팔로군으로 중국에서 많은 전투경험이 있는 군인이다. 아마도 자기가 죽으면 내가 그의 가족에게 전해주기를 바라서 혼자 죽을 결심을 했을까. 그는 내가 볼 수 없는 수십 미터 골짝 아래로 내려가 산모통이를 돌아갔고 조금후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하고 죽었다. 나는 그 바위틈에 앉은 채로 그가 죽은 곳에는 가지 않았다.

벌써 산정에 올라와 있는 한국군은 수류탄폭음이 들린 골짝으로 포와 기관총을 쾅쾅 따따따... 한참동안이나 내리쏘다가 그쳤다. 내 생전 처음으로 강열한 연발의 폭음과 사격소리를 들었다. 나는 바위틈에 몸을 웅크리고 긴장해 있다가 잠이 들었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잠은 오는 것이다. 그 다음날 새벽에 나는 너무도 배가 고파 옆의 풀뿌리를 캐먹었는데 너무도 쓰디 쓴 식물이었다. 나는 총을 버리고 산을 넘어 안변고을 쪽으로 달려 산을 내려간다. 내가 넘어온 산꼭대기에서 한국군이 내 쪽 공중으로 탕탕 핑 핑 총을 내리 쏜다. 위험을 직감했다. 더 뛰어 산 밑에 왔는데 바로 그 때 저만치 큰길에 30세 정도의 남자분이 지나간다. 나는 큰 소리로

“나 인민군에서 탈출했어요” 그는 서서 나를 바라보다가 손짓하며 나에게 외친다.“빨리 그 인민군복을 벗고 와요.” 나는 즉시 인민군 겨울동복을 벗어버리고 백포내의바람으로 그에게 달려갔고 그를 따라가 과수원 안에 있는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내 얘기를 했다. 내가 순천고급중학교 졸업반으로 강제동원되어 인민군이 되었지만 공산당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배고프겠다며 식사를 차려주면서 자기도 인민군에 징발되어 남쪽지방으로 갔다가 도주해 집에 돌아왔다고 했다.

그날 오후 그 집에 한국군 학도병 둘이 휴식하러 들어왔다. 집주인은 이 한국군 학도병에게 내가 학생으로 인민군에 강제 입대당한 우익청년이고 인민군에서 탈출했다고 소개했고 그 두 학도병들은 자기들도 학생이었다며 내게 친절했다. 그들은 나를 귀순병이라 부르며 그들의 26연대 야전본부로 데려갔다. 나는 그 야전본부의 옆방에 들어있는 치안대원들과 함께 있으면서 연대장 국군대령과도 대화를 했다. 그 연대장은 내가 처음 만난 한국군 고급장교인데 그 야전본부의 부하사병들을 가끔 무섭게 벌주어 때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최전선으로 북진을 지휘하는 연대장이라서 그 눈이 매서웠다.

나는 나를 도와준 과수원주인 그 救人의 이름을 모르지만 얼마나 고마운 은인인가. 야전본부 사병들은 내가 고향에 돌아가도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서북쪽 평안남도 고향땅은 한국군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미수복지구라서 나는 귀향길을 포기하고 자원하여 부산진 유엔군포로수용소로 갔으며 3년간의 수용소생활을 했다. 그 3년간의 수용소 생활 중 2년은 내가 유엔이 실시한 CIE교육프로그램의 중고등부 국어교사가 되어 소내의 학생들에게 문학과 글짓기도 가르쳤다. 그러다가 정전회담 중 이승만대통령의 비밀반공포로석방조치로 자유의 대한민국사회에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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